최근에 와인을 취미로 즐기게 되면서 느낀 문제점이 있다.
아무래도 와인도 나름 도수가 높은 주류인데, 다양한 맛을 즐기다보니 어쩔 수 없이 과음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커피처럼 와인도 온도와 그날 나의 미각 컨디션에 따라서 맛의 차이가 많이 느껴지는데
혼자 마시다보면 그 와인에 대한 나쁜 기억만 생겨서 그 부류의 와인을 마시지 않게된다.
하지만, 나는 맛이 없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좋은 평가를 하면 "한번 다시 마셔볼까?"라는 재도전 기회가 생긴다.
과음의 문제와 재도전의 기회를 한번에 잡을 수 있는게 와인 시음회인데,
와인 카페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와인 모임이 1인당 20만원 이상 지불해야 마실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직 그정도로 와인에 돈을 지불할 의사가 없다면, 각종 수입사나 호텔에서 열리는 와인 시음회가 적절한데
최근에 강서 메이필드 호텔의 디오니소스 와인페어가 나에게 딱이었다.
2023.06.02 - [여행 명소] - 메이필드호텔 디오니소스 와인페어
그 뒤로, 이사 문제 때문에 다른것은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6월초 황금 연휴 때 남해쪽으로 여행을 가려고 준비해뒀어서, 그 여행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같이 가기로 한 가족이 최근 업무량이 너무 많아져서 연휴 때 출근을 해야했고 눈물을 머금고 해당 여행을 취소했다.
그러다 평소에 자주가던 와인샵인 베레비노에서 광교쪽 와인바와 협업하여 시음회를 연다는 소식을 받았고, 바로 2명을 예약했다.
다행히 광교랑 집이랑 가까워서, 시간에 맞춰서 도착할 수 있었다.
어쩌피 술을 마실 예정이라 차는 가져가지 않고 택시로 이동했다.
자리에 착석하고, 오늘의 시음 와인들의 리스트를 구경했다.
오늘 시음해볼 와인은 총 7가지로,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칠레 의 와인으로 구성되었다.
시중에서 흔히 보이지 않는 와인인걸 보니, 품질 대비 가격이 낮은 와인을 고르신 사장님의 수고가 느껴졌다.
심지어 거대한 디캔터도 준비하셔서 와인을 미리 시간과 온도에 맞춰 디캔팅 해두셨다.
따로 안주를 주문하지 않아도, 기본 안주들을 준비해주셨다.
대부분 와인 맛을 해치지 않고, 가볍게 입가심을 하기에 좋은 견과류와 크래커 위주였다.
내가 한번씩은 먹어본 안주인걸보니 코스트코에서 안주류를 준비하신 것 같았다.
첫번째로 시음할 와인은 이탈리아의 스파클링 와인이었다.
병이 황금색으로 빛나서, 누군가에게 선물하기도 좋을 것 같은 와인이다.
가르가네가가 블랜딩된 와인은 처음 마셔보는 것 같은데, 이탈리아 청포도의 아버지 같은 품종이라고 한다.
탄산은 아주 강력하고 입에 오래 남았으나, 아무래도 묘하게 뒤에 튀는 향이 있었고 신맛과 과실향의 조화가 내 취향은 아니어서 빨리 마시고 넘겼다.
이날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도미타 브뤼다.
피노누아가 블랜딩 되어서 그런가 샴페인 못지 않은 무게감에 섬세한 산도가 마실수록 기분 좋은 맛이었다.
달지 않아서 질리지 않고 계속 들어가지만, 무게감이 좀 있어서 방방 뛰지는 않는다
무엇이랑 먹어도 잘어울릴 맛이다.
보르도 블랜딩 화이트라 조금 기대했었는데, 2021년 빈티지라 그런건지 아니면 이 와인이 그런건지
너무 미끈미끈한 향만 나고 과실향이나 다른 향은 느껴지지 않았다. 몇년 더 묵히면 맛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 먹기에는 부족한 와인이었다.
살짝 이 와인을 위한 변명을 하자면 최근에 부르고뉴 화이트 중에서도 프리미에 크뤼 라인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 와인은 2022년 빈티지였고 그 와인도 미끈거리는거 외에 다른 향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탈리아 화이트의 정석을 보여준 피안 오로 토스칸 화이트
아직 경험은 짧지만 이탈리아 와인에 대해 느낀점은 지금 당장 먹어도 맛있고, 어떤 음식과 먹어도 맛있으며
한입 먹는 순간 바로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과일맛이 난다.
이 화이트는 딱 그런 느낌의 화이트 와인이었는데, 일단 향부터 폭팔적인 리치향이 났고 입안에서도 열대 과일류의 향이 마구 퍼져나갔다.
물론 피니쉬가 길지는 않았지만 누가 먹어도 맛있다고 느낄 와인이었다.
산지오베제 특유의 쿰쿰함을 멜롯으로 잘 눌러서 밸런스가 좋았던
고베르노 토스카나 로쏘 고베르노
레드와인이다.
대형마트에서 산지오베제로 만든 유명 와인을 몇번 마셔봤지만 특유의 쿰쿰한 향 때문에 버렸었는데, 이 와인은 과실향도 잘 나면서 타닌감이 적당해서 마시기 좋았다.
데헤라 델 까리잘 시라는 시라 품종의 정석적인 와인이었다.
시라 특유의 진한 포도즙 맛과 높지 않은 탄닌감, 그리고 후추향이 밸런스 좋게 올라왔다.
시라가 처음에 바로 오픈해서 마시면 포도즙 맛만 나는 경우가 많은데, 아무래도 베레비노 사장님께서 미리 디캔팅을 하신 후 적정 타이밍에 서빙 해주신 것 같다.
이래서 와인은 잘 아는 사람이랑 먹을수록 같은 와인이라도 더 맛있게, 더 잘어울리는 음식이랑 먹을 수 있는 것 같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와인 공부를 하고 있다.
샤또 베크로 랄랑드 드 포므롤
오늘 시음 와인중에 가장 가격대가 높은 와인이다.
포므롤은 보르도 와인 중에서도 우완 이라고 불리는 강 오른쪽에 위치한 지역에서 생산된 와인이다.
포므롤의 지질학적 특징으로는 산화철이 토양에 많이 함유되어 있다고 하는데,
내가 표고버섯 향이라고 느꼈던 향이 아무래도 이 지역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사실 내가 20대 초반 시절 보르도 와인이 각 집에 선물로 많이 들어갔었는데 그때 마셨던 와인들이 정말 맛이 없었다.
그리고 최근에 와인을 접하게 되면서, 같이 와인을 드시는 분들이 아예 미국같은 신대륙와인이나 부르고뉴 와인을 좋아하시는 바람에 보르도 와인에 대한 생각을 재정립할 기회가 없었었다.
이 와인을 맛보고 나니 [부르고뉴가 음성적인 와인이라면 보르도는 양성적인 와인이다] 라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입안에 꽉 차는 볼륨감과 코로 올라오는 구수한 땅과 버섯 냄새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입 안에 이어지는 장미향까지.
어릴적 신의 물방울에서 묘사하는 좋은 레드와인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이날 너무 즐거워서 사진으로 담지는 못했지만, 와인바를 나서면 바로 광교호수공원이 펼쳐져있다.
등뒤로는 도심의 불빛이, 앞쪽으로는 호수의 조용한 물냄새가 인상깊은 가게였다.
특히 문을 닫기 전에는 모든 직원과 손님들이 어우러져서 오늘의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취향에 대해 아주 깊게 소통했다.
최근에 와인 시음회를 방문하면서 느끼는건데, 와인은 대화를 불러오는 술이다.
아무래도 스토리가 많고, 설명이 필요한 주류다보니 자연스럽게 옆에 앉은 사람이 아는 것을 얘기해주고 처음 마시는 사람은 자신의 소감을 얘기하면서 교류하게 된다.
이날도 내가 평소라면 마주할 수 없는 사람들과, 오래 만난 인연처럼 대화했다.
포기했던 남해 여행이 전혀 아쉽지 않은, 새롭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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